완남부원군 이후원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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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완남부원군 이후원 묘역은 이후원(1598~1660)의 묘역으로, 1704년 현재 위치에 조성되었다. 인조반정 공신으로 정묘호란, 병자호란에서 활약했으며, 효종의 북벌계획에 참여했다. 우의정을 지내며 송시열, 송준길 등 인재를 등용했다. 묘역은 호석과 해치상이 특징이며, 송준길, 송시열, 이정영, 김수항 등 당대 명사들의 글씨를 담은 묘표가 있어 조선 후기 묘제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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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남부원군 이후원 묘역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묘역 정보 | |
국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유형 | 기념물 |
이름 | 완남부원군 이후원 묘역 |
한자 이름 | 完南府院君 李厚源 墓域 |
지정 번호 | 29 |
지정일 | 2009년 12월 31일 |
주소 | 서울특별시 강남구 자곡동 산 39-3 |
소유자 | 전주이씨광평대군파완남부원군종회 |
면적 | 2,039.6m2 |
문화재청 ID | 23,00290000,11 |
웹사이트 | 해당 없음 |
2. 생애
이후원(1598~1660)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1] 정묘호란 때는 총융사 종사관으로 활약했고, 병자호란 때는 척화파로서 청에 결사 항전할 것을 주장했다.[1] 효종의 북벌계획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전함 200척을 준비하는 등 군사력 강화에 힘썼다.[1]
1657년(효종 8) 우의정에 올라 송시열, 송준길을 중앙 정계에 등용하는 등 인재 발굴에 힘썼다. 이들은 훗날 노론의 영수가 된 대표적인 성리학자들이다.
만년에는 세자좌부빈객, 지경연사, 지춘추관사 등을 역임했다. 성품이 청렴하고 인화를 중시했으며,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했다. 바쁜 관직생활 중에도 경사(經史)를 공부하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1668년(현종 9) 충정(忠貞)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1685년(숙종 11) 광주의 수곡서원(秀谷書院)에 제향되었다.
2. 1. 가계와 초기 생애
이후원(李厚源, 1598년 ~ 1660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자는 사심(士深), 호는 오재(迂齋)이다. 세종의 아들 광평대군 이여의 7대손이며, 군수를 지낸 이욱(李郁)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판서를 지낸 황정욱(黃廷彧)의 딸이다.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2. 2. 관직 생활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정사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1] 1624년(인조 2년)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이를 수습하는데 공을 세웠다.[1] 정묘호란 때는 총융사 종사관으로서 큰 역할을 하였다.[1] 병자호란 때는 척화파로서 청에 결사 항전할 것을 주장하였다.[1]1639년(인조 17년) 승지가 되었고, 수원부사에 천거되었으나 왕이 곁에 두고자 하여 병조참지로 임명하였다.[1] 충청도관찰사로 나가서는 민력(民力)을 무리하게 쓰지 않고 사풍(士風)을 바로잡았으며, 군정(軍政)을 닦는 데 힘썼다.[1] 이후 강화부유수가 되고 1642년(인조 20년) 대사간을 역임한 뒤 이듬해 한성부우윤이 되었고, 완남군(完南君)에 봉해졌다.[1]
1644년(인조 22년) 심기원이 모반을 일으키자 이 난을 수습하는 데 적극 가담하여 공을 세웠다.[1] 이듬해 호조참판, 대사헌을 거쳐 1646년(인조 24년) 형조참판이 되어 회맹연(會盟宴)에 참여하였다.[1]
효종의 북벌계획 추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전함 200척을 준비했다.[1] 1650년(효종 1년) 실록청 당상 겸 동지춘추관사로 《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1] 1655년(효종 6년) 예조판서로서 추쇄도감제조(推刷都監提調)가 되어 전국의 노비를 추쇄, 강화(江華)를 방비하게 하였고, 장악원에 소장되어 있던 《악학궤범》을 개간하여 사고(史庫)에 분장(分藏)하게 하였다.[1] 이후 한성부판윤, 형조·공조의 판서를 거쳐, 대사간,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1]
1657년(효종 8년) 우의정에 올랐으며, 송시열, 송준길을 발굴하여 중앙 정계에 중용되도록 하는 등 인재 등용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1]
2. 3. 학문적 업적과 인재 등용
이후원은 1657년(효종 8) 우의정에 오른 뒤, 송시열과 송준길을 발굴하여 중앙 정계에 중용될 수 있도록 하는 등 인재 등용에 큰 업적을 남겼다. 이들은 훗날 노론의 영수로 성장한 조선 후기 대표적 성리학자들이다. 이후원은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특히 성리학에 뛰어났다.3. 사후 평가와 묘역
이후원은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백성들에게 존경받았으며, 뛰어난 학문과 인재 등용으로 조선 후기 성리학 발전에 기여했다. 그의 묘역은 여러 차례 이장을 거쳐 현재 위치에 자리 잡았으며, 조선 후기 묘제와 석물 제작 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묘표는 당대 명유학자들과 명필들의 글씨를 담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크다.
인조반정 때 공을 세워 정사공신 3등으로 책록되었고, 정묘호란 때는 총융사 종사관으로서 큰 역할을 하였다. 병자호란 때는 척화파로 청에 결사 항전할 것을 주장하였다. 효종의 북벌계획이 추진될 때는 전함 200척을 준비하는 등 북벌계획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1]
1657년(효종 8) 우의정이 된 이후원은 송시열, 송준길을 중앙 정계에 중용될 수 있도록 하는 등 인재 등용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1]
이후원의 묘역은 1660년 처음 조성된 후 여러 차례 이장되었다. 처음에는 금천 삼석산에 조성되었으나, 1685년(숙종 11) 광주 세곡으로 옮겨졌고, 1704년 현재 위치인 광주 지곡으로 다시 이장되었다. 그의 첫 부인 광주 김씨의 묘도 1654년 금천 일직촌으로 이장된 후, 1685년과 1704년 두 차례 이후원 묘와 함께 이장되었다.[1]
묘역에는 봉분 1기, 묘표 2기, 상석 1기, 향로석 1기, 주준석 1기, 해치상 2기, 망주석 2기가 있다. 봉분은 호석으로 둘러져 있으며, 호석 중앙에는 묘의 방향이 정남향임을 나타내는 '오향(午向)'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1]
묘표는 1685년 6월 이후원의 넷째 아들 이선이 세운 것과 1671년 3월 동춘당 송준길이 비문을 짓고, 1682년(숙종 8) 우암 송시열이 추기(追記)를 썼으며, 이정영이 글씨를 쓰고, 당시 영의정 김수항이 '오재상국이충정공묘표(迂齋相國李忠貞公墓表)'라는 두전(頭篆)을 쓴 것이 있다. [1]
향로석에는 '완남이충정공묘(完南李忠貞公墓)'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양 측면에는 이후원의 조상 묘 위치, 이후원과 광주 김씨의 생몰년, 이장 경위 등이 기록되어 있다. 향로석 좌우에는 해치상으로 추정되는 석물이 한 쌍 있고, 바깥쪽으로는 망주석이 한 쌍 있는데, 기둥에는 세호(細虎)가 새겨져 있다.[1]
완남부원군 이후원 묘역은 조선 후기 묘제 및 석물 제작 양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묘표는 송준길과 송시열이 각각 비문과 추기(追記)를 짓고, 이정영이 비문의 글씨를 썼으며, 김수항이 두전(頭篆)을 쓰는 등 당대 명유학자들과 명필들의 글씨를 확인할 수 있게 하는 자료로, 정사(正史)인 실록 등을 보완하는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3. 1. 사후 평가
이후원(李厚源)은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백성들에게 존경받았다. 인조반정 때 공을 세워 정사공신 3등으로 책록되었고, 정묘호란 때는 총융사 종사관으로서 큰 역할을 하였다. 병자호란 때는 척화파로 청에 결사 항전할 것을 주장하였다. 효종의 북벌계획이 추진될 때는 전함 200척을 준비하는 등 북벌계획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1]1657년(효종 8) 우의정이 된 이후원은 조선 후기 대표적 성리학자이자 후에 노론의 영수로 성장한 송시열(1607~1689)과 송준길(1606~1672)을 발굴하여 중앙 정계에 중용될 수 있도록 하는 등 인재 등용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이는 조선 후기 성리학 발전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1]
3. 2. 묘역의 역사와 특징
이후원의 묘역은 1660년 처음 조성된 후 여러 차례 이장되었다. 처음에는 금천 삼석산에 조성되었으나, 1685년(숙종 11) 광주 세곡으로 옮겨졌고, 1704년 현재 위치인 광주 지곡으로 다시 이장되었다. 그의 첫 부인 광주 김씨의 묘도 1654년 금천 일직촌으로 이장된 후, 1685년과 1704년 두 차례 이후원 묘와 함께 이장되었다.[1]묘역에는 봉분 1기, 묘표 2기, 상석 1기, 향로석 1기, 주준석 1기, 해치상 2기, 망주석 2기가 있다. 봉분은 호석으로 둘러져 있으며, 호석 중앙에는 묘의 방향이 정남향임을 나타내는 '오향(午向)'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1]
묘표는 두 종류가 있다.
- 1685년 6월 이후원의 넷째 아들 이선이 세운 묘표
- 1671년 3월 동춘당 송준길이 비문을 짓고, 1682년(숙종 8) 우암 송시열이 추기(追記)를 썼으며, 이정영이 글씨를 쓰고, 당시 영의정 김수항이 '오재상국이충정공묘표(迂齋相國李忠貞公墓表)'라는 두전(頭篆)을 쓴 묘표. 이 묘표는 1685년 광주 세촌으로 이장할 때 세워졌다.[1]
향로석에는 '완남이충정공묘(完南李忠貞公墓)'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양 측면에는 이후원의 조상 묘 위치, 이후원과 광주 김씨의 생몰년, 이장 경위 등이 기록되어 있다. 향로석 좌우에는 해치상으로 추정되는 석물이 한 쌍 있고, 바깥쪽으로는 망주석이 한 쌍 있는데, 기둥에는 세호(細虎)가 새겨져 있다.[1]
이처럼 묘역과 석물들은 조선 후기 묘제 및 석물 제작 양상을 보여주며, 특히 묘표는 당대 명유학자들과 명필들의 글씨를 담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크다.[1]
3. 3. 묘역의 문화재적 가치
완남부원군 이후원 묘역은 조선 후기 묘제 및 석물 제작 양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묘표는 조선 후기 대표적 성리학자인 송준길과 송시열이 각각 비문과 추기(追記)를 짓고, 당대 명필인 이정영(1616~1686)이 비문의 글씨를 썼으며, 전서(篆書)에 능했던 당시 영의정 김수항(1629~1689)이 두전(頭篆, 전서로 쓴 묘표의 이름)을 쓰는 등 당대 명유학자들과 명필들의 글씨를 확인할 수 있게 하는 자료로, 정사(正史)인 실록 등을 보완하는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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